에도시대 일본 사회는 도시화, 자본화, 시장화의 진전으로 기존의 지식, 사상으로는 더 이상 대응하기 어려운 한계 상황에 계속 직면하였고, 이러한 한계 상황을 맞아 지식인들이 시대적 소명의식을 갖고 끊임없이 고민하는 과정에서 다양하고 견고한 지적 토대가 구축되었다. 신분을 넘어 각 지역별로 시대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신지식이 생산되고 소비되는 현상은 일종의 지식시장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며 놓은 과학기술, 인문, 사회과학 수준을 자랑하는 현대 일본의 지적 역동성과 다양성은 지식이 독점되지 않고 공론의 장에서 경합한 에도시대 지식시장의 태동胎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p235
한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억울'이라는 말은 한자어로 '抑鬱'이라고 쓴다. 일본에도 같은 단어(よくうつ, 구야시이)가 있다. 한국어와의 차이점은 일본의 '억울'은 정신병리학 상의 용어로 심하게 기분이 침체되어 있는 'deep depression'의 심리상태를 말한다. 한국어의 '억울하다'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 남의 잘못으로 자신이 안 좋은 일을 당하거나 나쁜 처지에 빠져 화가 나거나 상심하는 것'을 의미하는 데 반해, 일본어의 '구야시이'는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남과의 경쟁에서 패하건, 남이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여 분하거나 유감의 심정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많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남을 원망하는 마음에 이르게 되지만, '구야시이'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을 책망하는 마음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남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구야시이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울함은 '한恨'으로 이어진다. 한국인의 '한'은 복수심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어쩔 수 없음을 스스로 삭혀야 하는 속절없는 원망과 체념의 심정을 내포한다. 일본의 구야시이도 '한'으로 연결되지만, 이는 '통한痛恨'의 의미로서 자신을 바꿔 자신을 분하게 만든 상대에게 설욕하겠다는 '절치부심切齒腐心'의 결의를 내포한다. 그래서 한국의 '억울하다'에 비해 일본의 '구야시이'가 더 강렬한 심리적 에너지장을 형성하고 현실의 변화를 수반할 가능성이 높은 심리이다. 지나친 단순화이지만, 한국과 일본 간에는 그러한 심리와 성향의 차이가 있고, 그것이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p269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일본사★★★(신상목,뿌리와이파리,2017.7.24) Oct 11, 2017
Zack's Comment
<훈련된 외교관의 시각으로 풀어낸 에도시대 이야기>
에도시대
[江戶時代(강호시대) ]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이 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되어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 정권의 본거지가 에도[江戶:현 도쿄]였으므로 이렇게 부르며, 또한 정권의 주인공인 도쿠가와의 성을 따서 도쿠가와시대라고도 한다. 이 시대는 가마쿠라[鎌倉]시대에 이룩되기 시작한 봉건사회체제가 마지막 마무리를 거쳐 확립된 시기이며, 무사계급의 최고지위에 있는 쇼군이 막강한 권력을 장악하고 전국을 통일지배하는 집권정치 체제가 확립된 시기이다.
한국인에게 영원히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을 정도의 치욕을 안겨 준 옆 동네 준 일본의 근대화 과정을 훔쳐본다. 아직도 지속되고 있는 역사적, 정치적 갈등 속에서 일본이 우리에게 안겨준 통한의 역사에만 방점을 찍고 좀처럼 바뀌지 않는 상대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키워가기보다는 그 원인을 상대가 아닌 나 자신에서 찾고자 하는 노력만이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대비할 강력한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동의한다. 그것은 우리 일상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인생의 실패를 이겨내는 현명한 선택이 되리라 생각한다.
현자는 문제의 원인을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외부에서 찾지 않고, 조금은 아프지만 자신을 책망하며 통제 가능한 진정한 내면의 변화를 꾀할 것이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