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34
- 책장을 대하면 흐뭇하고 든든한 것 같았다. 알몸뚱이를 감싸는 갑옷이나 혹은 살갗 같기도 하다. 한 권씩 늘어갈 적마다 몸속에 깨끗한 세포가 한 방씩 늘어가는 듯한, 자기와 책 사이에 걸친 살아 있는 어울림을 몸으로 느낀 무렵이 있다. p51
- 여자란 자기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짐승 같다. 남들이 사랑을 하니까 사랑한다는 식의 허영을 그녀들의 지나가는 조잘거림에서 깨닫는 수가 적지 않다. p58
- 사람이 사람을 안다고 말할 때, 그건 얼마나 큰 잘못인가. 사람이 알 수 있는 건 자기뿐. 속았다 하고 떼었다 할 때, 꾸어주지도 않은 돈을 갚으라고 조르는 억지가 아닐까? p92
- '사랑'이란 말 속에, 사람은 그랬으면, 하는 바람의 모든 걸 집어넣는다. 그런, 잘못과 헛된 바람과 헛믿음으로 가득 찬 말이 바로 사랑이다. p92
- 마음은 몸을 따른다. 몸이 없었던들, 무얼 가지고, 사람은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보고지라는 소원이, 우상을 만들었다면, 보고 만질 수 없는 '사랑'을,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게 하고 싶은 외로움이, 사람의 몸을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른다. p100
-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도, 한번 말이 되어 나와버리면 허물어버릴 수 없는 담을 쌓고 만다. p155
- 어떤 사람이 어떤 사회에 들어 있다는 것은 풀어서 말하면, 그 사회 속의 어떤 사람과 맺어져 있다는 말이라면, 맺어질 아무도 없는 사회의, 어디다 뿌리를 박을 것인가. 더구나 그 사회 자체에 대한 믿음조차 잃어버린 지금에. 믿음 없이 절하는 것이 괴롭듯이, 믿음 없는 정치의 '광장'에 서는 것도 두렵다. p183
*구운몽
- 저 옛날 얘기의 개구리는 울음 한 번에 구슬 하나씩 뱉었는데 미물보다 나은 우리는 말 한마디에 독버섯 하나씩을 토한다 내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p325
- 현대는 성공의 시대가 아니라 좌절의 시대며, 건너는 시대가 아니라 가라앉는 때며, 한마디로 난파의 계절이므로, 다음에 현대인의 인격적 상황은 극심한 자기 분열이다. p335
광장 / 구운몽 **** (최인훈, 문학과지성사, 1976.8.25)
[Zack's Comment]
1960년 11월 새벽에 처음 소개된 광장은 한자로 쓰여졌다고 한다. 그 이후 여러번의 개작을 통해 한글판이 나오고 문학사의 수많은 호평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읽혀지고 있는 책이다.
벌써 50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분단의 현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이라는 커다란 구조적 상황등은 크게 변한게 없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은 주인공 이명준이 말한 "광장"의 연장선으로 세상을 향한 개개인의 해답을 찾으려 고뇌하는 젊은이들의 광장이란 생각을 해본다.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표범의 가죽으로 만든 징이 울리는 원시인의 광장으로부터 한 사회에 살면서 끝내 동료인 줄도 모르고 생활하는 현대적 산업 구조의 미궁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수많은 광장이 있다." 1961년판 서문...
책을 읽는 내내 작가의 긴 문체와 추상적인 표현에 가끔씩 길을 잃었고, 50년전의 분단의 상황에 처한 주인공에 감정 이입을 하기가 쉽지 않은 탓인지 이따금 현기증이 나기도 했다.
주인공 이명준이선택해야만 했던 광장은 사랑하는 여인이 있는 남쪽도 월북한 아버지가 있는 북쪽도 아닌 제 3국이였고, 그에게 제 3국이란 희망의 메세지가 아닌 절망의 나락이였던 것이다. 인간으로 살기 위해 그는 또다른 광장을 찾아야만 했지만, 결국 그가 가야할 곳을 찾지 못한다.
2011년 현재를 사는 우리는 주인공 이명준이 살면서 고뇌 했던 그 광장의 주인공의 되어 있다. 그 주인공의 시선으로 우리의 광장을 돌아 본다. 그 광장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쩌면 이명준이 살았던 그 시절의 광장보다 더 살벌하고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길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그 광장을 가득 메운다. 그러나 인간으로 살기위해 우리는 이 곳을 떠날 수 없다.
수많은 정보와 호화로운 문명의 혜택 속에서 별다른 고민 없이 서로의 광장을 공유하며 사는 듯 하지만, 제3국을 염원했던 이명준이 조국인 이곳으로 돌아와 이 광경을 본다면 어떤 말로 그의 생각을 길게 늘어 놓을지가 궁금하다... 아마도 그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현기증을 느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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