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덤 스미스가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지는 스토아 철학에서 현자(賢者)는 모든 상황에서 부동심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스토아학파가 생각하는 현자는 근거 없는 비난에 대해 아무런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그것 역시 운명이라 체념한다. 이에 비해 애덤 스미스가 생각하는 현자는 대부분의 경우 공평한 관찰자의 판단에 따라 평정을 유지하지만, 다만 근거 없는 비난에 대해서는 세상의 판단에 영향을 받아 괴로워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애덤 스미스는 지혜로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근거 없는 비난을 받는 것은 피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p62
건강하고, 빚이 없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의 행복에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가? 이런 사람에게는 추가되는 어떤 재산도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추가된 재산에 매우 들떠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지극히 가치 없는 경솔함의 결과일 것이다. (도덕감정론 제1부 제3편 제1장) p84
애덤 스미스의 행복론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인간은 최저 수준의 부만 있으면 행복하게 살 수 있으며 그 이상의 부의 증가는 행복에 영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생활필수품이 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은 행복이 평등하게 분배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지주의 이기심과 탐욕에 의해 행복이 사람들 사이에 평등하게 분배된다.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구조를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부른 것이다. p93
상업 사회는 시장 사회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애정과 지혜에 의해 지탱되는 사회가 아니라 자애심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다. 다만 시장 사회를 떠받치는 것은 자애심뿐만이 아니다. 시장 사회는 페어플레이를 받아들이는 정의감, 교환을 가능하게 하는 교환 성향 그리고 설득 경향에 의해서도 유지된다. 정의감, 교환 성향, 설득 경향은 동감이라는 인간의 능력에 근거하는 것이므로, 시장 사회를 지탱하는 근본은 자애심과 함께 동감, 즉 타인의 감정을 자신의 마음속에 옮겨 그것과 같은 감정을 끌어내려는 마음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p155
자연적 자유의 체계가 확립된 사회에서는 노동과 자본의 사용 방법은 소유자 개인에게 맡겨진다. 개인은 자신의 노동과 자본을 어디로 향하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정부보다 더 주의를 기울이며, 노동과 자본을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법으로 사용할 것이다. 개인이 정의의 원칙들을 위반하지 않는 한, 이러한 개인의 행동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사회에 최대의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p217
애덤 스미스에게 경제 성장이란 부가 증가하는 것뿐만 아니라 부자와 가난한 이들 사이에 관계가 생겨나는 것을 의미했다. 부자가 자신의 부를 혼자서만 소비한다면, 또는 자기 집 안에 처박아 둔다면, 부자와 가난한 사람과의 연결고리가 전혀 없게 된다. 그러나 부자는 더 큰 부를 이룩하려는 야심에서 자신의 재산을 농업, 제조업, 상업 등에 투자한다. 이것에 의해 경제가 성장하는 동시에 노동수요가 증가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일자리가 주어진다. 가난한 이들은 임금이라는 형태로 부를 획득하여 평안한 생활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경제 성장의 참된 목적은 바로 여기 있다. 이렇듯 부자들은 투자 활동을 통해 더욱 큰 부를 획득하게 된다. 이렇듯 부자는 애초에 가난한 이들을 도우려는 의도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양자는 부를 매개로 연결되는 것이다. p248
인간 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에서는 생기는 것으로 보인다. 탐욕(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야심(ambition)은 개인적 지위와 공적 지위의 차이를 과대평가하고, 허영(vain-glory)은 무명과 유명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이러한 종류의 사치스러운 격정의 영향하에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처한 실제 환경에서 불행하고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흔히 어리석게도 그가 감탄하는 처지에 도달하기 위해서 사회적 안정을 어지럽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인생에 대해) 조금만 살펴보아도 인간 생활의 일상적인 모든 상황에서 교양 있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평온하고, 마찬가지로 기뻐하고, 마찬가지로 만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p256
현대인에게 많은 것을 암시하는 우화 중에서 지옥과 천국의 차이를 숟가락으로 설명하는 것이 있다. 숟가락이 너무 길어 음식을 스스로 가져갈 수 없는 경우, 지옥에서는 기를 쓰고 자기 입으로 가져가려 해 모두가 굶주려 불행하고, 천당에서는 음식을 상대의 입에 넣어주기 때문에 모두가 행복하다는 이야기다. p266
지금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도메 다쿠어, 우경봉, 도서출판 동아시아, 2010.12.10) Aug 18, 2018
Zack's Comment
도덕 감정론과 국부론의 저자 애덤 스미스를 만나다.
인간 개개인의 극도의 이기심을 근간으로 부를 창출하며 성공가도를 달리던 자본주의.
이제는 그 부작용이 극에 달해 상대적 박탈감에 불행한 현대인의 수는 점점 늘어나 대도시의 대부분의 시민은 미세 먼지로 뒤 덥힌 서울 하늘과 같은 갑갑함을 느끼며 행복하지 않는 듯하다.
2018년 현재....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가 사회주의 체제에 판정승을 거뒀다는 것은 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탐한 이래에 이 세상 어디에도 유토피아는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왜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가?
"인간 생활의 불행과 혼란의 최대 원천은 하나의 영속적 상황과 다른 영속적 상황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것에서는 생긴다 탐욕(avarice)은 가난과 부유함 사이의 차이를 과대평가한다. "라는 그에 말에 동의한다.
인생은 그 어느 때보다 부유함이 간절한 이 시기에 마음속 공정한 관찰자에게 물어본다. 내가 원하는 그 부유함이 가난함과의 차이를 과대평가하면서 우울해지는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건강하고, 빚이 없고,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의 행복에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가?
어려운 길이다. 그러나 그 길 위에 인생의 평정심을 유지하며 지속적 행복감을 느낄 수 있는 비밀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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