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9
<무진기행>
-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 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p10
-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을 쫓아 버렸다. p39
<다산성>
극장 안에서는 거울을 철거할 것을 나는 호소하고 싶었다. 스크린 위의 잘생기거나 멋진 또는 용감한 인물과 자기를 완전히 무결하게 혼동하고 있던 사람들이, 벨이 울리고 불이 켜진 뒤에 겨우 열 발자국쯤 걸어 나오다가 거울 속에서 자신의 착각을 할 수 없이 인정하고 환멸을 느끼게 해 버리는 극장 안의 거울은 과히 재치 있는 도구가 아니다. p274
<야행>
차츰 그 여자는 깨달았다. 사내들이 탈출하고 싶어 하는 욕구는 거의 모두가 조건부라는 것을. 다시 말해서 사내들은 영원히 '이곳'을 떠날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들은 잠깐 울타리를 뚫고 밖으로 나가 본다. 그러나 아침이 되면 얼른 제자리로 돌아온다. 아니 미처 그것도 아니다. 울타리 안에서 울타리를 만지작거리며 생각만 한없이 되풀이하는 것이다. p347
<서울의 달빛 0장>
사람들이 결국 바라는 건 필요 이상의 음식, 필요 이상의 교미, 섹스의 가수요(假需要), 부잣집 며느리 여름철에 연탄 사 모으듯, 남의 아내건 남의 아내가 될 여자건 닥치는 대로 붙는다. 물처럼, 공기처럼, 여력만 있으면 빈자리를 남겨두지 않는다. 인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 가수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드는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리하여 전쟁. 전쟁은 필연적이다. 전쟁으로 모두 빼앗기고 다시 시작.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p359
무진기행★★★★(김승옥, (주)민음사,1980.11.30) May 23, 2014
[Zack's Comment]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생명연습
-건(亁)
-역사(力士)
-차나 한 잔
-다산성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서울의 달빛 0장(章)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김승옥 소설집을 읽다. 김승옥 작가를 통해 1960년~70년대의 서울을 구경해 본다. 그가 그리는 서울은 우울하다. 그 우울함에는 조금의 희망조차 엿보이지 않는 우울함 그 자체이기에 더욱 슬프다. 때로는 냉소적인 언어로 탐욕과 욕망의 도시인 서울을 스케치하며, 평범한 듯 결코 평범하지 않은 인간 내면의 복잡한 그 무엇을 끄집어 낸다.
2014 년의 서울은 어떠한가? 1960년대의 촌티를 벗은 서울은 세련된 모습으로 성공한 사업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어딘가 모를 외로움은 여전하다. '서울'이라는 상징적 도시를 배경으로 50여 년 전 젊은 김승옥 작가가 그려낸 도시의 슬픔은 여전히 서울 하늘 아래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답답한 마음에 '서울'을 벗어나 '무진기행'과 같은 도피 여행을 꿈꾸지만, 결국 안개 낀 무진의 아름다움에 잠시 마음을 빼앗길 뿐이다.
"인간은 자연인가? 메우고 썩힌다. 썩은 사타구니에서 쏟아지는 썩은 감정. 자리를 찾지 못한 자들의 증오. 평화가 만든 여유. 여유가 만든 가수요(假需要). 가수요가 만든 부패. 부패가 만드는 증오. 부패는 이미 시작되었으며 남은 일은 증오의 누적. 그리하여 전쟁. 전쟁은 필연적이다. 전쟁으로 모두 빼앗기고 다시 시작. 인간은 행복할 자격이 있는가?" <서울의 달빛 0장 中>
2014년 5월의 어느 날, 1964년 서울의 어느 거리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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